인물탐구2014. 2. 10. 16:27

살아 있는 화석, 은행나무 살펴보기

 

 

 

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한다는데여...

화석에 의하면 은행나무가 지구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약 2억5천년 전쯤이니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할 만하지요...

은행나무는 얼마나 오래 살까요?

우리나라에는 천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도 있어요.

천연기념물 중에는 400년을 넘게 산 것이 많습니다.

은행은 '은빛 살구'라는 뜻이랍니다.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쓰는 이유는

단풍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고 병에 잘 안 걸리며

공해에도 잘 견디고 공기를 정화하기 때문이죠.

은행 열매가 떨어지면 구린내가 아주 고양해서

요즘은 은행이 안 열리는 수그루만 가로수로 심기도 한답니다.

은행나무는 수그루와 암그루가 따로 있는데 겉으로 봐서는 잘 구분이 안됩니다.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5. 6. 11:10




신사임당 시와 그림에 뛰어난 여인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글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양반집 딸이나 되어야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것조차 서당이 아닌 집에서 배워야 했다. 또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과거 시험에 도전할 수 없었다. 

조선의 남자들은 남편을 잘 챙기고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 여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조선 역사에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신사임당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으로 일컬어진다. 그녀는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신사임당이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넓은 마음을 가진 외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는 총명한 손녀에게 무엇이든 가르쳐 주려고 했다. 

신사임당은 한 번 배운 것은 금방 익혀서 외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곤 했다. 

신사임당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안견이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란다." 

선물을 받은 신사임당은 하루 종일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아름다운 산이 눈앞에서 꿈틀거리듯이 펼쳐져 있는 그림이었다. 

신사임당은 결심했다. "나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말 테야."

여자이지만 열정적이었던 예술가 신사임당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나이가 어린 데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집 밖의 먼 곳을 갈수 없었기 때문에 마당에 있는 나무와 풀을 즐겨 그렸다. 

신사임당은 열아홉 살에 이원수라는 남자와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1536년에 훗날 조선의 유명한 학자가 될 셋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율곡 이이다. 신사임당은 지혜로운 아내이기도 했다. 

한번은 남편이 출세 욕심에 어떤 권력자의 편에 가담하려고 했다.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 권력은 분명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따랐다. 

아니나다를까, 신사임당이 예언한 대로 그 권력자는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쫓겨났다. 

결혼 후에도 신사임당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놀랐으며, 그녀의 재능을 칭찬했다. 

신사임당이 예술가로 이름을 떨친 데는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신사임당처럼 위대한 재능을 가진 여성은 조선에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시대를 잘못 만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지 못했다. 

신사임당은 훌륭한 예술가로, 또 아들 이이를 통해 현명한 어머니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행복한 조선의 여성이었다 할수 있다.



시와 그림 모두가 뛰어났던 멋진여인 신사임당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5. 1. 08:52

혼자 물리학을 익혀 수학 교수가 된 갈릴레이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이고, 천문학자인 갈릴레이. 

근대의 자연 과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우고 있답니다. 

이탈리아 피사라는 곳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연 과학에 더 많은 흥미를 느껴서 혼자 물리학을 익혀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성당에 매달려 있던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본후에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고,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한후 물체의 낙하 속도는 그 무게와 상관이 없다는 '물체의 낙하 법칙'을 발표했습니다. 

1609년에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만들었고, 그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관측해 목성의 위성과 태양의 흑점이라는것을 발견했습니다. 

1632년에 <천문학 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천동설을 고집했던 교황청으로부터 종교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지못해 천동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풀려났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한 그는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수 있게 한답니다. 

그렇게 풀려난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집에 갇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29. 14:08

자신의 귀를 잘라 자화상을 그린 '고흐'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붕대를 감은후 '자화상을'을 그린 '고흐'. 

그는 네덜란드 후기에 활동한 인상파 화가입니다. 

네덜란드의 목사 준데르트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화랑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고흐는 28세 때부터 브뤼셀, 헤이그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는것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나 농민들을 그렸던 그가, 이 시기에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란 아주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었답니다.

초기에는 렘브란트.밀레의 영향을 받아서 좀 어두운 색깔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고갱과 베르나르등과 사귀면서 그의 그림은 점차 밝은 색깔의 그림으로 바뀌었습니다. 


1888년에 고갱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둘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고흐는 정신병을 앓기 시작했고, 고갱과 심한 다툼을 하다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귀에 붕대를 감은후 그 유명한 작품 '자화상',을 남기게 된거죠. 

이후 고흐는 정신병으로 인해 발작과 입원을 반복했고, 치료를 받긴 했으나 끝내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죽음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고흐의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해바라기', '감자를 먹는 사람들',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 등이 있습니다.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24. 08:46

알콩이의 오늘의 두번째 인물탐구 : 신재호 이야기 ^^


[신재호]독립 운동가이며 사학자



독립 운동가이며 사학자인 신재호(1880~1936), 언론인이며 호는 단재, 단생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한학을 배워 10세 때 이미 <통감>과 <사서 삼경>을 읽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 등 언론을 통한 항일 운동에 힘썼다.

1907년에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만들고 신문논석을 통해 국채 보상 운동에 앞장섰다. 

한일 합방 후 중국을 통해 국채 보상 운동에 앞장섰다. 

한일 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광복회 부회장과 임시 정부 수립 등에 관여하면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또, 역사 연구에도 힘을 기울여 발해 유적과 광개토 대왕릉을 돌아보았고,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해 역사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28년에 폭탄 제조소 설치 자금 마련을 위해 일하다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1936년에 옥중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지은 책으로<조선 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영전>등이 있다.



미안2



이분은 어딜찾아도 사진을 구할수가 없었어요. 

다음에 이분의 사진을 구하게 되면 다시 포스팅을 해볼께요 ^^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24. 08:33

알콩이의 오늘의 인물탐구 : 오늘은 왕자였지만 승려가 되었던 

의천스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의천]왕자 출신의 승려



"의천 스님, 와예서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여기는 고려의 항구인 벽란도. 

의천을 따르는 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천에게 물었다. 

1055년에 태어난 의천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아들, 즉 왕자 출신 승려였다. 

이 날 의천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남겨 두고 고려를 떠나려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송나라로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곳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릴 적 승려가 된 이후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 왔는데, 송나라에는 천태종이라는 새로운 불교 사상이 있다고 한다. 천태종을 제대로 배워 고려에 알리고 싶다. 불교 공부를 더 하려는 건 내가 아니라 고려를 위해서다. 

그래서 가려는 것이다.


이윽고 의천은 송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의천은 많은 불교 경전을 배에 싣고 고려로 돌아왔다. 

아버지 문종은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왕자인 데다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의천은 고려에서 가장 큰 절인 흥왕사의 주지 스님이 되었다.

"우리 고려도 불경을 인쇄해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문종은 의천의 생각을 들어 주었다. 

의천은 중국, 거란, 일본 등에서 들여온 경전을 모아 속장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속장경을 만들려면 나무에 불경의 내용을 일일이 새겨야 했고, 이것을 완성하는 데는 9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고려의 불교 경전이라고 하면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 대장경을 떠올리는데, 속장경은 훗날 팔만 대장경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의천은 불교 보급외에 나라 발전에도 큰 관심을 가진 승려였다.

당시에 고려 사람은 돈을 사용하지 않고 물건을 교환하는 방법으로 장사를 했다. 

유학을 할 때 송나라 상인들이 화폐를 만들어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을 본 의천은 숙종에게 화폐 제도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숙종은 의천의 의견을 받아들여 화폐를 만들어 보급했다. 

'해동통보'라는 구리돈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화폐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백성들이 물물 교환을 더 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화폐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화폐를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조선시대 후기였다.



문자


오늘은 왠지 누구간에게 연락이 하고 싶어지는 날이네요~ 

이웃님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길~~~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18. 13:46

알콩달콩 인물탐구 : 오늘의 이야기는 정선 입니다^^


[정선]독창적 화법으로 그린 화가






오늘도 어김없이 정선은 붓과 종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몇몇 화가가 그와 동행하였다. 

정선 일행이 도착한 곳은 한양에 있는 인왕산 아래였다. 

인왕산은 꼭대기에 수많은 바위가 솟아 있는 산이었다. 

정선은 그림 그릴 생각은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았다. 

다른 화가들은 벌써 인왕산의 모습을 종이에 담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선이 붓을 들었다. 

정선의 그림을 보던 동료 화가가 깜짝 놀랐다. 

정선은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그리는 중이었는데, 넓적한 붓으로 여러 번 덧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네는 왜 몇 번이나 덧칠을 하는 건가?" 

"이렇게 여러 번 덧칠을 해 바위를 그리면 그 느낌이 더 생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마침내 정선이 인왕산 그림을 완성하였다. 

화가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정선이 그린 인왕산 풍경은 살아 있는 동물처럼 꿈틀거리느 느낌을 주었다. 

바위에 여러번 덧칠을 해서 색의 차이를 다르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정선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림 그릴 때만큼은 배가 고픈 줄도, 시간 가는줄도 모를 정도였다.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본 이웃 사람이 그를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의 화원으로 추천하였다. 

도화서 화원이 된 후 정선의 그림 실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몇 년 후에는 양반들이 정선의 그림을 서로 구하려고 경쟁을 할 정도였다. 

당시 화가들은 대대로 전해 오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서로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도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정선은 달랐다. 

그는 늘 새로운 그림 기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생생한 느낌을 주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날카로운 바위가 많은 금강산을 그릴 때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붓의 끝을 최대한 뾰족하게 한 후 먹물을 묻혀 날카롭게 솟은 바위의 선을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정선의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정선파'라고 부를 정도였다. 

정선은 천재 화가이자 성실한 화가였다. 

유명해지고 많은 재물을 모았는데도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만 파고들었다. 

한 번은 친구가 정선에게 물었다. 

"자네는 그 동안 그림 그리느라 얼마나 많은 붓을 사용하고 버렸나?" 

"그 동안 내가 사용했던 붓을 다 모으면 아마 큰 무덤이 될 걸세." 

무덤을 쌓을 정도로 많은 붓을 사용했던 정선. 

그는 오늘날에도 조선이 낳은 최고의 풍경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잠



맛점들 하셨나요? ^^

점심먹고나니 잠이 밀려오기 시작하네요 ㅎㅎ

눈을 똥그랗게 뜨고 지금 힘을 빡!! 주고 있는 중이랍니다~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12. 07:52

오늘의 인물탐구 문종!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왕 문종. 


1046년, 스물여덟 살의 젊은 왕자가 고려의 새 왕이 되었다. 

제11대 왕 문종이었다. 

개경에 있는 궁궐인 수창궁에서는 문종의 화려한 즉위식이 열렸다. 

즉위식이 끝난 후 왕은 신하들과 나라일을 살필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문종의 눈에 금칠이 된 화려한 의자가 들어왔다. 

물끄러미 의자를 바라보던 문종이 신하에게 말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의자로구려." 

"황금 의자는 대대로 왕께서 앉으시던 것입니다."

"활려한 의자에 앉는다고 왕의 권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오." 

은 왕의 겸손한 말에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왕은 화려한 의자를 치우고 소박한 의자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의자뿐만이 아니었다. 

문종은 금으로 자수를 놓은 화려한 이불도 소박한 것으로 바꾸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총명하였던 문종은 왕이 된 후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결국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늘 백성을 생각한 문종은 혁신적인 법을 만들었다. 

고려 시대에도 죄를 지으면 나라에서 조사를 해서 벌을 내렸다. 

그런데 조사를 충분하게 하지 않을 경우 잘못도 없는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문종은 새로운 법을 공포하였다. 

"사형 판결은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반드시 세 번 심문을 하여 혹시라도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또 죄인을 심물할 때는 세 명의 조사관이 심문을 하게 하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심문할 때보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더욱 신중하게 가실 수 있을 것이다."

종의 이러한 개혁 정책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문종의 마음에 백성들이 가진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을 존중하는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불교를 열심히 믿었던 문종은 개경 근처에 큰 절을 지을 결심을 했다. 

이 때 최충을 포한한 신하들이 농사로 바쁠 때 백성들을 절을 짓는 데 동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문종은 신하들의 의견이 옳다 생각하고, 농사일이 바쁘지 않을 때만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종은 37년간 고려를 다스렸는데, 이 때 고려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발전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파이팅

또 일주일이 다가고 금요일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들 화끈한 불금들 되세영~ ^^


Posted by 쭘마렐라
인물탐구2013. 4. 7. 14:17

[김병로]정의로운 변호사




김병로 정의로운 변호사 1914년, 김병로는 일본으로 유학 가 법학을 공부한 지 4년 만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변호사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백성들은 법 앞에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억울한 일로 재판정에 선 조선 사람이 사정을 호소해도 일본인 검사외 판사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또 사람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김병로는 이러한 동포들의 억울함을 덜어 주는 일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서는 수많은 독립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체포당해 재판을 받았다. 

그럴때면 법정에 자주 나타나는 변호사가 있었으니, 바로 김병로였다. 

변호사는 돈을 받고 죄인의 변호를 맡지만, 김병로는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 온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변론을 해 주었다. 

때로는 자신의 돈을 털어 독립 운동가의 가족을 돕기도 했다. 

일본은 그런 김병로를 눈엣 가시로 여기고 그가 변호사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결국 김병로는 농촌으로 내려가 13년 동안 울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3년 뒤, 새로운 나라 대한 민국이 탄생했다. 

대한 민국 국민이 된 후에도 김병로는 올곧은 인생을 살았다. 

1948년, 대한 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김병로를 초대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이승만과 김병로는 대립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처벌하는 데 반대했던 것이다. 

친일파를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에서 였다. 

그러나 김병로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친일파를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고, 친일파를 그대로 놔 두면 훗날 나라와 민족을 저버리는 또 다른 배신자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친일파의 죄를 붇지 않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김병로 또한 이승만의 정책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김병로는 수많은 위협들을 물리치고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킨 참으로 용기 있는 법률가였다. 

김병로는 죽은 후에도 대한 민국 법률가의 본보기가 되었다.



고고씽



벌써 오늘 하루 반이 지났네요~

남은 오후시간도 행복하게 고고씽~~ 하세용 *^_____^*



Posted by 쭘마렐라